킹콩을 봤다. 세번째로.
...좀 갑작스러웠어. 어제 이맘때만 해도 전혀 생각 없었는데, 킹콩에 관한 어떤 글을 읽다가, "Beautiful." - 그 유명한 대사가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리곤 갑작스레, 다시 보고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몰려들어왔다. 거의 눈물이 나는 경험이었다. '반지'를 만든 PJ의 후속작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보러갔던 첫번째 관람, 에이드리언 브로디에 대한 내 느낌이 정말이었나를 확인하러 갔던 두번째 관람, 이제야,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콩을 생각하자니, 지난 두 번의 관람에선 내가 그녀석의 편에 서 있었던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이다. 거대한 그래픽 고릴라, 야.. 대단하다, 그럼 이만. 수준.
황급히 예매 사이트를 뒤지니 CGV는 이미 전 지점에서 내렸고 조조할인 4천원이 가능한 곳은 메가박스 뿐, 그것도 8일 오늘로서 막을 내리는...
아쉬운 마음에 박차를 갈긴 꼴...
집안에 일이 많은데도 포기 않고, 밤을 밝히고, 새벽에 집에서 기어나왔다.
시간 넉넉, 가뿐한 맘으로 지정좌석으로 갔을 때 내 자리를 차지하고 신나게 먹고 있는 여자들 일행 때문에 약간 불쾌했으나 곧 탈환. 도대체 영화시간 8시 15분은 누구 XX쯤으로 아는지 25분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기어들어오는 인간들.
결국 맨 나중에 들어온 커플이 내 옆자리로 기어왔다. 내 옆에 앉은 기집애는 상영 내내 휴대폰 들춰보기 신공으로 이미지 회복 물건너가게 만들었다.
상황설명은 여기서 대충 종료. 영화.
세번째야 뭐... 이젠 앞서 두 번에서 놓쳤던 자막 대사들이 무더기로 들어온다. 아차, 33년작 킹콩을 본 후구나. 그게 앞서의 두 번과 확연한 차이를 만든 듯. 05년 킹콩을 본 후 보게 된 33년 킹콩은 일견 우스울 수 밖에 없었으나, 그걸 본 후 다시 05년 킹콩을 보고 있으려니... '아, PJ, 당신 그 영화 정말 좋아했군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버린다. 72년이라는 세월의 갭을 각본의 세밀한 장치로 메우면서도, 기저에 깔린 B급 정서를 놓치지 않고 또 동시에 극단적인 현실주의를 실현한 화면들,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히다.
배우들... 참, 어쩌면...
기존 헐리우드 액션 영화의 수많은 '액션용' 스타들, '화면발 살려주는' 끝내주는 미녀들과 여전사들, 기타등등...
여기 출연한 배우들을 거기 끼워맞추려 하면 뭔가 비거나 튀어나간다.
'반지'에서 unsung heroes들을 모아 천상의 연기 앙상블을 보여줘버린 것처럼... 여기도... 여기저기 굵직한 이름들이 널리긴 했으나, 모두 어딘가 이상한(!) 데서 활약하던 사람들이다. 자칭 영화 많이 본다 생각하면서도 아주 기초적인 수박 겉핥기 수준에 머무는 본인을 요즘 '대중'의 표준으로 삼아본다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나오미 왓츠라는 배우가 도대체 누군지, 어디 나왔었는지 전혀 감이 안오니!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라는 컨셉이 민망해지는 순간.
그나마 몇 편의 영화들로 친숙한 이름인 잭 블랙. 하지만 거기서 땡.
아카데미상 탄 배우로 '아, 맞다, 그 사람.'하는 반응까지는 나오지만 수박 겉핥기한테 뭘 더 바라노.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나온 영화를 본 역사가 없는 걸.
이런 (내게만?) '긴가민가'한 캐스트들을 데리고 PJ는 제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PJ도 우리도 인정해야 할 거다. '반지의 제왕 - 피터 잭슨'. 이 문구 하나로 게임 오버라는 걸. '반지'를 만든 사람들이 달려든다는데 캐스팅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근데 말이다. 이 사람들 일 내고 말았다.
첫번째 볼 땐 니콜 키드먼 짝퉁처럼 보이던, 그게 다였던 나오미 왓츠는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주고받는 대사가 있을 리 없는 킹콩과의 연기는 정형화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스탭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극사실적 컨셉, 배경 속에서 참으로 어울리는 연기를 해 주었다. 동물과의 교감을 주제로 한 영화는 뭔가 멜랑콜리한 불쾌감(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과 어색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영화에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한가지 더, 상황에 따른 적절한(!!) 괴성. 33년작의 페이 레이를 보면서는 솔직히, '아 소리좀 작작 질러, 이여자야!'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_-;; 얼굴은 눈부시게 이쁘지만 성격은 평면적인, 평범한 보드빌 댄서 이상은 안되어 보였구... 33년생인 마초맨 잭 드리스콜에게는 어울렸을지 모르나 05년생 시나리오 작가 잭이 봤다면 매력을 느꼈을까 싶은 33년생 앤 대로우.... ^^
잭 블랙은 솔직히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로만 접했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도 보았지만 그건 100% 존 큐잭에 신경쓰며 봤기에 잭 블랙이 누구로 나왔는지도 기억 안난다. -_-;; 어쨌든 '가볍지만 재기발랄한 코미디 배우' 그뿐이었다. 킹콩에서의 연기가 아주 강렬했다고는 말 못해주겠다. 그런데 중후반부, 피같은 필름들이 사지에 널부러진 것을 쥐고 경악하던 표정은 꽤 좋았다. 이제 콩, 너뿐이다 라는 선전포고랄까. 드리스콜의 첫등장 씬에서 공수표 날리기 신공은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에잇, 분명히 말하건대 '킹콩'안에서 뭔가 짜증나는 캐릭터인데 배우에게 버닝하게 되고 만 잭 드리스콜. 다른 남우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브로디를 점찍은 후 완성된 각본이라니 어울림이 어쩌고 하는 말은 안해도 되겠다. 아카데미상을 타고도 받지 못했던 주목을 요즘 폭발적으로 받는 중이니 역시 배우들에겐 블록버스터란 피할 수 없는 유혹이려나.
그가 좋은 배우란 건 앞으로 수많은 포스트에서 몇 번을 더 말하게 될지 모르니 그냥 넘어가고^^ IMDb 게시판의 누구 말마따나 잭이 앤에게 키스할 때 둘의 입술이 닿기도 전에 그의 코가 그녀의 얼굴을 찌르더라는 재미난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음향기사를 자기로 착각하고 황홀해하고 있는 앤을 바라보며 짓던 미소, 여기서 무너진 여자관객들 많으리라.
아차, 그는 수십명의 거친 '바다의 사나이들'이 득시글하는 배에서 하나뿐인(?) 여인을 차지한 행운아였다. 역시 펜은(타자기는^^) 강하다. Go Shakespeare!!
'피아니스트'에서 브로디와 연을 맺은 토마스 크레취만도 나왔다. 긴가민가 캐스팅이 계속된다. 전직 '반지' 팬답게 '저거 파라미르 아녀?'라는 순진한 소리를 했었지만 결국 다른 배우란 걸 인정했다. 아, 데이빗 윈햄이 했어도 기뻤겠지만 토마스 이사람, 느낌이 장난 아니다. 사람들이 차기 존스박사로 주섬주섬 밀고 있다. 존스박사에게 필요한 뻔뻔함(이건 브로디한테 배우면 되겠네)과 유머가 좀 부족해보이는 건 사실이나, 잉글혼을 경험하고 나니 인디 코스튬이 그대로 상상이 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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